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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The Jesus I never knew

by pinike 2009. 8. 26.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읽었다.

읽는 데 시간이 꽤 많이 들었다.

읽는 동안 계속 책의 내용을 정리해 갔다.

적고 싶은 내용은 많은 데 짧고 명료하게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빼먹지 않고 글을 적는 데 꽤 애를 먹었다.

필립 얀시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읽고 느낀 점과 책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다.

 

탄생

빛과 우주만물 모두를 창조하고 시간과 공간 너머에 계시며 모든 역사와 모든 동식물들과 모든 고체,기체,액체를 다스리시는 위대하고 위대한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주 한 구석 먼지보다 작은 어느 행성에 사는 초라하게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피조물을 사랑한 나머지 그렇게 꿈틀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 중에서도 가장 나약한 팔레스타인의 한 아기로 말도 못하고 딱딱한 음식을 못먹으며 대소변도 못가리고 어느 십대소녀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고 그 소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창조 이래 가장 충격적인 사건

 

유대인 예수
예수는 수많은 유대인 중 하나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도 예루살렘과 꽤 떨어진 촌동네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자란 촌사람이었다.
사투리도 썼다.
나사렛에서는 본래 선한 것이 날 수 없었다.
그는 예수라는 아주 흔한 이름을 가진 평범하고 가난한 보통 사람이었기에 그가 구세주 된다는 생각은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예수는 정말이지 그냥 사람이었으며 마리아의 자식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생명을 걸고 로마와 싸우는 열심당원과 끔찍히 금욕생활을 하는 에세네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최선을 다해 준수하고 사는 바리새인 등의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에 설득당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고생만 실컷하다 서른 셋의 나이로 십자가에 메달려 비참히 죽어 버린 메시야, 구세주의 죽음 이후 쇠락해가는 한 국가와 흩어져 버린 민족, 세기가 지날수록 점점 타락해져가는 인간들과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등의 현상을 보노라면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설득력이 없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유혹
사탄은 필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에 대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매우 치명적인 급소를 찔렀고 하나님이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나타난 예수는 음식과 안전(혹은 능력)과 권력의 세가지 제안에 대해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상당한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자신은 이 세가지를 아직도 끊임없이 바라고 있다.
예수는 이 교활한 유혹자를 당장 멸절하고 모든 인간과 역사를 단숨에 구원하실수도 있었지만 꾹꾹 참아내야 했다.
예수에게 이 싸움은 매우 긴장감 넘치는 치열한 사투이며 양측은 민감하게 서로를 예의주시하고 있고 우리는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집중해서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 싸움은 예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역사의 향방이 걸린 중요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예수가 인내와 억제를 고집함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왜 그토록 참아야만 했던가?
방탕한 아이를 부모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 바라만 보고 있었다면 아이의 잘못됨이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신적 권리 즉 신비, 기적, 권위 이 세가지를 모두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있다.
그는 강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제는 사랑이 아니오 사랑을 이끌어 낼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창조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사랑이다.

 

인간 예수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선호하는 예수의 외모는 키가 크고 선하게 생겼고 야위었다.
하지만 예수가 나기 훨씬 전 적힌 이사야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예수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사야대로라면 예수는 못생기고 키가 작아 볼품없는 외모에 혹 등이라도 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헐리우드 예수 영화들을 보면 예수는 너그럽고 차분하고 동요가 없고 심오하며 침묵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복음서는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그는 인간이었기에 자신이 창조한 생리활동과 자연환경의 모든 법칙에 지배받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치유능력이 있었지만 다른 치유능력이 있는 경쟁자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좀 더 큰 지방으로 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마을들을 돌 뿐이었다.
그의 전도행위는 효율적이지도 능률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위대한 선생으로 불리울 만한 교사로서의 훌륭한 자질이 있었지만 다른 선생이나 성인과는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이야기하는 점이었다.

 

팔복
팔복은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납득하기 힘들고 불쌍한 내용이지만 예수가 예수 됨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이다.
팔복의 주된 내용은 '폭격 당해 집없이 나앉아 가족과 동료를 잃고 슬퍼하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이다.
얼핏 그저 불행한 사람들 기분 나아지라고 하는 정신나간 소리따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팔복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진리 중 하나이다.
팔복이 진리 일 수 있는 이유는
1. 팔복은 미래의 희망에 대한 약속이다.
어렵고 부족한 사람에게 상급이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이다.
그 희망안에는 팔복의 메세지 전달자인 예수가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상급'에 대한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팔복은 열악한 상황일 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돈과 명예와 쾌락이 풍부한 사람에게 하나님 같은 건 별로 필요가 없다.
3. 팔복은 그 내용 자체가 문자 그대로 사실이고 진실이다.
실제로 영웅이나 스타, 부자, 유명인, 연예인 같은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가난한 가정안에 화목이 있고 봉사하는 손길에 행복이 있고 고난 받는 사람에게 용서가 있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있다.

 

산상수훈의 가혹함
예수의 산상수훈 메세지에는 도덕적 가혹함과 엄격함이 심해서 실제 예수의 메세지대로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많은 크리스챤이 산상수훈의 교훈대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노력할수록 느껴지는 것은 결코 다다를수 없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자책감 그리고 실패에서 오는 비관적 불행함 뿐이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교훈을 실천하되 높은 이상에 가까워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최선이라는게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알고 예수가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고 내 안에 예수가 있어 다행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 우리가 알아야 할 바이다.
산상수훈의 가혹함과 엄격함은 예수가 절대적 이상의 수위를 낮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지만 그 이상을 실천하지 못해도 한없이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죄인의 친구
예수는 죄인의 친구였다.
예수가 그토록 죄많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매력을 먼저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예수는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들어올 수 없다' 대신 '애시당초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란 있지 않다'를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교만해질래야 교만해질 수 없는 소외받고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더 아끼었다.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당하였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와 같은 종류의 고통을 예수도 당하고 느꼈다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된다.

 

기적의 단편
기적은 밤낮 철야기도를 사십일간 하더라도 이루지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라서 자주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기적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도 내게 일어나길 고대하거나 아니면 아예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포기하고 산다.
예수는 생애 대략 서른번 정도의 기적을 행했고 대부분은 그것이 소문이 나지 않길 바랬다.
첫 기적은 혼인잔치에서 술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인간영혼에 구원의 임무를 맡고 내려온 메시아가 사교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행한 아주 이상하고 초라한 일회성 기적이었다.
이후 예수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다.
예수 이전 병이란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 여겼기에 병에 걸리면 '이 병은 왜?'하고 질문했지만 예수는 '이 병은 무슨 목적으로?'라고 초점을 바꾸었다.
예수 이전 거룩함으로 구별하였던 시대에 나병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 보았고 그들을 만지는 예수의 행동은 모든이를 놀라게 하는 파격적이고 통념을 뒤엎는 반항적 행위였다.
사실 앞서 포도주의 기적이나 치유의 기적은 이미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행하고 있는 기적을 좀 짧은 시간에 해낸 것 정도일 뿐이다.
지붕을 뚫은 친구와 나병환자이야기는 그 지붕이 요즘 같지는 않았다는 구조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내용이며 그들을 응원하고 몸의 치유를 도구로 죄사함을 이야기하는 예수의 모습도 역시 이상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군중은 개떼같이 예수를 추적하였고 예수에게 억지 왕관을 씌워 더 많은 기적을 맛보려하였지만 예수는 진리로써 그들을 훈계하였고 말은 못알아 듣겠고 기적은 안보여주고 따분해진 군중은 그렇게 흩어졌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냄으로 예수는 부활을 예고하였고 인간은 부활한 나사로를 살해한다.
인간에게 기적이란 참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여흥거리 혹은 마술같은 이벤트정도였을 뿐이다.
그래서 신앙은 기적을 낳지만 기적은 신앙을 낳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
예수가 기적을 행했던 이유는 첫번째 적어도 지상에서 활동하는 동안 만큼은 당장 눈에 띄는 잘못된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는 없었던 탓이 있었을 테고 두번째는 그 기적으로 다가올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메세지를 알리려 했던 이유가 있었을 테다.

 

예수가 죽었다.
보통의 위인전기에서 주인공의 마지막은 대게 전체 내용의 10%를 넘지 않는데 반해 복음서는 삼분의 일정도를 예수가 죽게되는 과정에 할애하며 마치 그 죽음의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나머지가 서론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지구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창세 이래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사건은 결단코 없으며 거기에는 기적도 없고 구출장면도 없는 그저 셰잌스피어를 훨씬 능가하는 끔찍한 비극만 있을 따름이다.
죽음의 절차는
1. 예루살렘 입성
왕과 같이 입성하지만 '호산나'라고 외치는 그 입술로 '십자가에 못박으라'라고 외칠 수 있음을 예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2. 최후의 만찬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행위는 겸손과 봉사를 이야기하기전에 당시로썬 너무 천한 행동이어서 제자들은 놀라움을 넘어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3. 배신
예수가 메시아다 보니 유다가 유독 악한 것처럼 도드라보이지만 사실 유다 혼자만이 아닌 온 나라 전체가 그를 배신하였고 작당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고 예수는 벌거벗기워 수치스러운 자세로 매달려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했다.
4. 겟세마네
예수는 정말 외로웠고 두려웠다.
만약에 진짜 잔을 옮겨 달라는 예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줬다면 어찌되었을까..
인간의 역사자체가 느닷없이 중지되고 시대는 끝장나고 인류는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십자가는 예수의 목적이었다.
5. 재판
예수에게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에 기존 세력은 정치적으로 위협과 불편함을 느꼈고 결국 예수는 체포된다.
예수는 신문 과정에서 평소 잘 하지 않던 자신이 메시야라는 점을 시인하였고 그런 미친 헛소리는 날치기 불법 재판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하였다.
6. 수난 그리고 십자가
예수는 벗기워졌다.
심히 매질을 당했고 사람들은 예수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따귀를 얻어 맞았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뒤집어 씌워졌으며 징이 박힌 채찍에 등을 내주었다.
호위병과 구경꾼들은 가장 더러운 말로 치욕과 모멸의 조롱을 하였고 그 순간 아버지인 하나님은 끔찍히도 침묵하였다.
그리고 자기종교의 창시자, 죽어가는 영웅의 입에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망적인 발언이 나오며 그렇게 그는 죽었다.

 

復活
예수는 부활하여 열두번정도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약 6주 정도 지상에서 생활하였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는 말을 따른다면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본 총 오백여명 정도의 사람 이외에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복되다고 봐야겠다.
부활은 예수를 위대한 성인 중 하나로 만들 수 없게 했으며 부활은 우리에게 최후의 믿음이자 희망이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 우리가 당하는 비극, 마음의 고통,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을 잃은 충격과 비탄, 이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어떻게든 극복하는 길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昇天
부활은 그 사건 자체만으로 예수가 했던 모든 것이 진실이었고 예언도 앞으로 모두 실제 이루어질 것이며 그가 진실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승천은 예수가 나머지 임무를 인수인계하고 자신의 임기기간 복무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복귀하는 자리이며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예수는 그렇게 승천해서 더이상 볼 수 없기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였다.
승천은 하나님인 예수가 인간의 육신이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몸삼아 사시겠다는 이야기였다.
승천은 남겨진 우리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에게 하는 것임을 세상에 보여주며 하늘로 올라가심과 같이 그대로 내려와 모든 역사를 정산할 그 날을 기다려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의 나라, 그의 왕국
당시 메시아에게 원했던 강력한 권력의 부유한 왕국과는 너무나 다른 왕국을 예수는 소개한다.
예수는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부를 포기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나라를 선언했고 그로인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며 예수의 죽음 후 사람들의 희망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예수는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살펴보더라도 부정한 여인이 머리에 향유를 부은 정도가 비교적 비슷한 경우일까, 그의 왕으로서의 명칭은 조롱하며 비웃을 때 들었던 '유대인의 왕' 정도 였으며 그가 써본 왕관이라면 가시로 만든 게 고작이라 그저 고통만 낳았을 뿐이었다.
그는 강압도 없었고 저항도 없었으며 그가 가진 권력은 연민의 마음으로 주린 자들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데 사용하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의 현장에서 모진 탄압과 핍박속에 교회는 버텨 남았고 그 영향력은 갈수록 넓어져 간다.
그의 왕국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러나 마지막 때가 오기전까지 완성되지도 않는다.
그 마지막 때는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더 주기위해 더디 오고 있는 중이다.
교회는 본분을 잃어가고 있고 세상은 더욱 타락해져가고 있고 인간은 더욱 이기적이고 악해져가며 사악한 권력의 쟁취만이 있는 정치, 더욱 자본주의 일변도인 경제, 하나님을 보는 눈을 멀게만 하는 문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순간에야 온전해짐을 입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과도기를 살며 그 나라를 널리 소개해야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자인 것이다.

 

예수
-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였으나 죄가 없는 이였다.
반면에 우리는 죄없지도 않고 죄인의 친구도 아니다.
-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가 바로 이 우주를 창조한 그 당사자이다.
- 예수는 하나님의 정확한 재현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이상 추측하고 오해할 것없이 이제 예수를 보고 알 수 있다.
- 예수는 사랑이다.
어느 곳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의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예수는 인간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올바른 재현이었다.
그는 최고의 모범을 보였고 우리는 더이상 변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예수는 인간을 직접 체험함으로 인간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진정으로 이해한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예수는 상처받은 치유자이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처형기구인 십자가를 믿음의 상징으로 차용한다.
십자가는 희망없는 곳에 희망을 세워놓으며, 끝나는 지점이 시작임을 얘기하며, 우리이 나음이 기적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서임을 보여주고, 언젠가 웃는 그 날까지 울고 있음을 뜻한다.

 

2009.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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