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trix - Deleted scene (Gangnam Style Parody) 매트릭스 삭제장면
싸이의 겸손과 한류스타들의 오만
日한류스타, 싸이 미국활동을 타산지석 삼아야
유재순
'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싸구려처럼(Dress Classy, Dance Cheesy)!'
이 같은 명언과 함께 '강남스타일'로 돌풍을 일으키며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한국가수 싸이(PSY. 박재상. 35세).
요즘, 미국에 있는 유학생이나 재미교포들로부터, 미국 TV에 비치는 싸이의 열풍을 보며,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몇 번이나 "울컥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실제로 SBS워싱턴 특파원은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도 미국에서 똑같은 경험을 했음을 리포터 형식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똑같은 감정을 여러 번 느꼈다. 싸이가 미국매체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할 때마다 쏟아내는 어록들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난 한 재미교포는, 미국 매체가 싸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인정하는지, 매번 볼 때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큰 감동을 느낀다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말했다.
분명 싸이는 가수다. 그런데 그는 감동을 준다. 그것도 가식적인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언어로 말이다.
얼마 전, 미국매체 'SPIN'은 싸이에 대해 1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대해부를 했다.
'당신이 몰랐던 K-POP의 새로운 10가지 선세이션'이라는 타이틀로, 싸이에 대한 10가지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도한 것이다.
첫째, 싸이는 4살 된 쌍둥이 아이들이 있는 아버지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콘서트'라고 알고 있다.
둘째, 싸이는 보스턴 버클리 대학에서 4년 내내 1학년으로 지냈다.
셋째, 싸이는 대단히 겸손하다. "당신(인터뷰어)도 알다시피, 나는 한국에서 12년 동안 가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여기(미국)서는 아직 신인이다. 나는 절대로, 내가 세계적인 K-POP스타가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넷째, 세계적인 팝스타 '어셔'에게 춤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싸이가 "내가 당신(어셔)에게 춤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하자, 어셔가 "방금 내게 뭐라고 그랬어?"라고 물었다. 그날 밤 우린 밤새도록 웃었(고 마셨)다.
다섯 번째, 싸이는 서민적이다. 싸이의 미국 매니저인 스쿠터 브라운이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했다. 싸이는 스쿠터와 비지니스 얘기가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곳은 참 멋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밤 당신과 함께 코리아타운에 가서 술을 마실 것이다."
여섯 번째, 싸이는 한국 아이돌의 멘토다. 싸이가 말했다. "대부분의 K-POP 아티스트들은 아이돌 밴드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선배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해외로 나가는 후배들을 위해 술을 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 힘내. 열심히 뛰어!'라고 격려를 해줍니다."
일곱 번째, '강남스타일'의 영감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해 싸이가 말했다. "강남은 낮에는 고급스럽지만, 밤만 되면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는 그런 특정 지역입니다. 내가 강남스타일에서 묘사한 '헤이 섹시', '젠틀맨'이 그래서 탄생한 것입니다.
여덟 번째, 싸이는 애주가다. 싸이는 미국에 처음 유학 왔을 때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술은 정말 잘 마신다. 내가 미국에 온 지 3일째 되던 날, 다른 학생에게 술을 마시자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어떻게 술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이나타운에 가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차이나타운에 가서 술을 사왔고, 밤새도록 내방에서 미친듯이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들은 술에 대한 충분한 내성이 없어서인지 모두들 토하기 시작했다. 그 후 갑자기 구급차 4,5대가 도착해서는, 내게 '헤이ㅡ 왜 그런 짓을 했어?'라고 물었다. 그때 나의 영어는 최악이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오로지 '나 아냐(NOt me!)' 였다."
아홉 번째, 한국나이와 미국나이는 다르다. 한국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1살이 된다. 그래서 12월 31일이 생일이면, 그 다음해 한 살을 더 먹어 2살이 된다.
열 번째, 싸이는 미국 NBC-TV 출연 공연에서 '명언'을 남겼다. "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싸구려(dress classy, and dance cheesy)처럼 춥니다."
그렇다. 싸이는 무엇보다 겸손했다. 자신을 제일 먼저 소개했던 CNN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런 시간,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저를 여러 번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공을 한국 팬들에게 돌렸다.
또한 지난 14일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그래서 영향력이 막강한 ‘NBC투데이쇼’에서, 이른 아침부터 화끈하게 광란의 무대를 보여주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고국팬 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 한국 젊은이들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여러분 X나게 멋있어요'를 외쳐, 현장에 있던 유학생들과 교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동영상 조회수 2억2천만, 빌보드 11위, 아이툰즈 1위 고수라는 명실공히 세계적 스타가, 파파라치가 따라붙으며 '당신은 최고야!'라고 외치자, 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루키(신인)라서 그래'라고 말해, 파파라치들까지 감동시켰다.
어디 그뿐 인가.
'강남스타일'의 뮤직비디오 패러디영상을 만들어 유티브에 올렸다가, 시 소유 시설물을 개인용도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14명의 수영장 안전요원들의 복직을 공개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남스타일'의 미국 팬 수백 여명은, LA엘몬테시 시청 앞에서 이들을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며 복직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듯 싸이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적 뉴스가 되고 있다. 또한 그가 한 마디 한마디 내뱉은 말은, '싸이어록' 또는 '명언'으로 정제되어 보도되고 있다.
현재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강남스타일'의 대히트도 있지만, 그보다도 귀로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성의를 다해 무대를 꽉 채우는, 그의 열정적인 무대매너 때문이다.
미국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는 것처럼, 헐리우드 스타들이 앞다퉈 그의 친구가 되길 원할 만큼, 세계적인 대스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자신을 낮추고, 그 공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된 상대방에게 돌렸다. 그를 맨 처음 소개했던 CNN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이런 싸이를 보면서 일본에 살고 있는 기자는, 언제부터인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일본에는 한류스타라는 고유명사가 생길 만큼, 인기를 얻고 활동하는 한국연예인들이 많은데, 왜 싸이 같은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언젠가 조선국적의 재일동포가 울먹이면서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수십여 년 동안 같은 지역에 살면서, 자신들을 무슨 외계인처럼 보듯 했는데, 한류바람이 불고 나서 비로소 '사람취급'을 해주더라고.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먼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전철을 탔던 우리 유학생들 앞에서, 김치 마늘냄새가 난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내뱉으며 다음 칸으로 건너가던 80년대와는 달리, 일본인들이 김치를 더 좋아하고 한국노래를 즐겨 듣는 '한류붐'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그러나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올 만큼, 그런 감동을 주는 한류 가수나 배우는 없었다.
또한 일본에 와서 자신들을 키워 준 한국팬들에게 감사하고, 자신의 허물을 너그럽게 감싸 안아주고 용서해주었다고, 일본의 미디어를 향해 솔직하게 고백하는 연예인은 더더욱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기자들이나 연예관계자들을 만나면, 하소연하듯 한국 스타들에 대한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기자들은 일본 연예인에 비해 기본적인 취재조차 너무 하기 힘들고, 사진을 찍으려면 돈 얘기부터 나온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예종사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한국 연예인들이 그저 돈돈돈 한다고 맹비난을 했다.
물론 이들의 비난은 반은 타당성이 있고, 반은 오버하는 측면이 있다. 한류스타 공연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초청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에 따라서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비난을 무조건 '어거지'라고 치부하기에는, 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연예인들의 일본진출을 지켜본 기자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가령, 싸이의 경우에는 어디를 가던지, 어떤 사람(유명무명을 불문하고)을 만나던지, 혹은 어떤 무대에 서든지간에, 항상 그에게서 물씬 풍기는 두 가지 냄새가 있다. 바로 '사람냄새, 땀냄새'다.
싸이의 특징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하는 태도가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도 늘 당당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지난 14일, 'NBC투데이쇼'에서 막간을 이용해, 그곳에 모인 교포들을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여러분 X나게 멋있어요!'라는 표현이 그렇다. 그날 그 무대는 미국전역에 중계되는 생방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런 표현을 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열광하고 세계인들이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어떤 무대에 서더라도 처음부터 끝이 똑같다. 저러다 무대에서 쓰러지면 어떡하나 걱정될 정도로,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열정적으로 뛰고 또 뛴다. 때문에 오래 전부터 그의 콘서트는 티켓이 없어 못 팔 정도로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이 같은 열정과 무대매너가 고스란히 물 건너 미국에 가서도 그대로 통용됐다. 이 역시 그를 대변해주는 '사람냄새, 땀냄새' 덕분이다. 거기에다 늘 겸손하기까지 하다.
반면, 일본에 오는 소위 한류스타들은 어떠한가. 자기 입맛에 맞게, 기분에 따라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시간이 들어가는 인터뷰에는 어김없이 거액의 인터뷰료를 요구한다. 심지어 사진료도 사전심사를 거쳐 거액의 돈을 따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일본언론사에서는 인터뷰를 할 때, 일정액의 인터뷰료를 지불한다. 코멘트 한 마디를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일본언론계이다 보니, 돈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현실성 있게 '적당한' 선에서 요구를 해야 한다. '당신네들이 좋아서, 필요해서 초청을 했으니 우리가 원하는 만큼 돈을 내놔야 한다. 싫으면 말고' 하는 식의 일방적인 요구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보기에도 참으로 민망하고 씁쓸하다.
일본에서 한국음악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은 좋은데, 아쉽게도 여기에는 싸이처럼 '사람냄새, 땀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9월 12일, 싸이는 미국 매니저인 스쿠터 브라운과 세계적인 팝스타 어셔를 대동하고 코리아 타운에 있는 클럽에 갔다. 그는 여기에서도 혼자 스타행세를 하며 놀지 않았다. 우선 마이크를 잡고 클럽에 놀러 온 교포손님들을 향해 우리말로, 스쿠터를 세 번 연호하게 한 다음, 예의 싸이다운 농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스쿠터는 한국여자를 X나게 좋아해요."
이 말은 곧,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립서비스라는 것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이 한마디로 클럽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고, 싸이는 어셔를 친한 친구를 소개하듯, 그렇게 클럽 손님들에게 소개했다. 이쯤되면 어셔가 인기스타 싸이에게 묻혀 온 모양새다. 그리고 여기서 싸이는 더욱 기가 막힌 감동의 멘트를 날려버린다.
"저는 한국에서 활동중인 가수 중에 유일하게 초상권이 없습니다. 맘껏 찍으세요!"
이 말에 대 환호성이 터졌다. 이는, 공연장에 들어갈 때마다 카메라가 있는지 일일이 가방조사를 하고, 일부 팬이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그 다음에는 어김없이 변호사로부터 경고장이나 초상권에 따른 벌과금을 요구하는, 한류스타들의 작금의 행태가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싸이의 서비스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어서 그야말로 대감동의 '미국공약'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옆에 미국매니저와 세계적인 팝스타 어셔를 세워놓고, 시종 우리말로 떠들고 환호를 이끌어냈다.
"여기에는 유학생도 있고 교포도 있겠지만, 저는 낯선 이곳에 와서, 낯선 상황에서, 낯선 얘기를 하면서 되게(대단히) 교민들의 마음을 느꼈어요. 그래서 제가 언제 기회가 될 지 모르겠지만 뉴욕에서, 뉴욕에 사시는 분들을 위해서, 멋진 공연을 한번 열도록 할게요."
이 말에 클럽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됐음은 물론이다.
나는 80년대부터 한국연예인들의 일본활동을 지켜봤지만, 일본에서 이런 멘트를 날리는 연예인을 보질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좋은 기사를 써주지 않았다고 압력이나 경고, 그리고 비판 기사를 썼다고 해서 협박을 받은 적은 있어도, 자신들을 응원해주었다고 유학생이나 재일동포들을 위해 위문공연 한 번 해준다는 연예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지난 6월, 한국뉴스를 일본어로 전하는 케이알뉴스( www.krnews.jp 제이피뉴스 자회사)와 일본의 한류전문 주간지 편집장과 미팅 약속이 있었다. 서로 제휴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비즈니스 미팅 약속이었다. 그런데 약속 전날, 정중한 어투의 이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저희 매체는 한류스타들에 대한 비판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기능을 하는 제이피뉴스・케이알뉴스와는 제휴를 맺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한국의 모 기획사가 일본 매니지먼트 기획사에 압력을 넣어, 만약 제이피뉴스・케이알뉴스와 함께 비즈니스를 하면, 앞으로 취재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류잡지를 만들어 이익을 내고 있는 자사로서는 우리 매체와 함께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결국 우리와의 비즈니스 협상은, 상대 일본 잡지의 일방적인 회피로 결렬됐다.
만약 싸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압력은커녕, '기사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한국매체와 손을 잡는 것이 당신들의 잡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오히려 격려하고 권장했을 것 같다. 싸이 만큼 한국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연예인이 어디 또 있을까. 대마초, 군대, 음주음전 등으로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돌팔매질을 당했다. 군대도 두 번 다녀왔다.
하지만 그는, 혹독한 죄과에 대해 남 탓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받아준 팬들에게 감사인사부터 전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보통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싶어한다. 특히 공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게다가 싸이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과거의 허물'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해준 은인이라고 그 공을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방송마다 우리말로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
지난 4년 동안 제이피뉴스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무명이든 유명한 연예인이든 관계없이,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해 보도해왔다. 때론 문제점이 발견될 때는 비판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해당 연예인 소속사에서 협박, 경고, 압력, 때로는 읍소작전으로 기사를 내려달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는 보도 매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싸이의 미국활동을 바라보는 마음이 남다르고 그 감동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한편으로는 그만큼 일본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이나 스타들의 언행에 대해 아쉬운 점이 많고, 또 안타깝다. 이런 느낌의 저변에는, 싸이가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사람냄새, 땀냄새'가 그들에게서는 전혀 나지 않는 이유 때문일수도 있다. '사람'보다 '돈'을 너무 앞세우는 것은 그만큼 감동이 반감되는 일이니까.
이에 대해 일본에서 활동하는, 소위 한류스타라고 하는 가수나 배우들은 싸이의 미국활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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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한곡 때문에 무더기 해고에 총격전까지
서태지-싸이
틀 깨부순 ‘두 통령’
서태지와 싸이, 그리고 한국음악
역사를 다시 썼다. 과한 표현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나. 지난 7월15일 유튜브에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이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세계에서 세운 기록은 읊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다. 아메리칸 톱 40 진입, 아이튠스 스토어 싱글 차트 1위,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 영국 유케이(UK) 싱글 차트 1위, 7주 만에 유튜브 조회수 2억회 돌파, 유튜브 사상 가장 많은 사용자가 추천한 비디오로 기네스 인증.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기관사는 강남역을 안내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강남”이라 말하고, 미국 엘몬트시에서는 수영장 안전요원들이 수영장에서 ‘강남스타일’ 패러디 영상을 찍었다가 ‘공공시설물의 사적 이용’을 이유로 무더기 해고를 당하는가 하면, 타이에서는 갱단들이 ‘강남스타일’로 춤 대결을 벌이다가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서태지와 아이들_⊙ 1992년 데뷔앨범 <난 알아요>한국말 랩으로 동시대 최고의 춤을 선보이며 ‘낡은 것의 종말’ 알림.
싸이_⊙ 2001년 데뷔앨범 <새>2012년 유튜브에서 사고처럼 터진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대박으로 내수시장용 트랙의 세계적 히트.
노래 한 곡 때문에 사람이 해고되고 갱단이 방아쇠를 당기는 이 웃지 못할 범지구적 현상. 애초에 일본 진출 정도만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곡이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린 이 예기치 않은 성공에 언론도 놀랐고 음반업계도 놀랐으며 무엇보다 싸이 자신도 놀랐다. ‘강남스타일’의 말도 안 되는 성공에 놀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저마다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성공의 비결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결론은 세 가지 정도로 수렴됐다. 첫째 “유튜브는 광대해”, 둘째 “날 이렇게 웃긴 가수는 네가 처음이야”, 셋째 “뭐야, 웃기는 놈이 노래도 잘 만들잖아”.
그렇다면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남스타일’ 이후다. 뜬금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거의 ‘사고’에 가까운 성공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혹자는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보고 비틀스와 아바를 들먹이며 한국의 케이팝이 세계에 진출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1990년대 중반 전세계를 반짝 수놓고 사라져간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 열풍과 다를 게 없는 현상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바를 꿈꾸는 호들갑과 로스 델 리오를 말하는 냉혹함의 간극은 거대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연 가능성의 공간이 그만큼 광활하다는 것을 뜻한다.
싸이의 미래가 아바가 될지, 로스 델 리오가 될지는 그가 다음 앨범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이뤄놓은 것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도는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싸이의 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그 지점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잠시 시계를 돌려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92 문화대통령
제도권 교육 박차고 나온
싱어송라이터 서태지
‘한국말 랩’ ‘댄스에 메탈’
서구 사운드를 우리 식으로
낯선 충격파 한국 뒤흔들어
1992년 4월11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연예프로그램 <특종! 티브이 연예>에는 색다른 코너가 있었다. 그 주에 새로 나온 곡들을 소개하고 개중 한 팀을 초청해 직접 무대를 마련해주며,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들어보는 코너. 코너 이름은 직관적이게도 ‘신곡 무대’였다. 신인들을 평가해주는 것치고는 심사위원의 면면이 어마어마했는데, 변진섭이 부른 ‘홀로 된다는 것’의 작곡가 하광훈,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를 쓴 작사가 양인자, ‘세시봉’ 시절부터 한국 연예계를 가장 지척에서 들여다본 연예평론가 이상벽,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 겸 프로듀서 전영록의 조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드림팀이었다. 이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무대에 처음으로 도전한 그룹은 한 남성 ‘트리오’ 그룹이었다.
지금 들으면 다소 촌스러운 그룹 이름은 당시만 해도 평범한 축에 끼었다. 아니, 한국 가요계에 유구히 내려오는 작명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도 좋겠다. 신중현과 엽전들, 나미와 머슴아들, 현철과 벌떼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별날 것 없는 그룹명, 얌전하고 앳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들의 무대는 충격적이었다. 조밀하게 쪼개진 비트와 신시사이저가 빚어내는 리듬은 하광훈이 칭찬한 것처럼 ‘상당히 좋았’고, 안무는 동시대 최고의 춤꾼들이었던 박남정이나 김완선의 무대와 비교해도 신선하고 과격했다. 노래가 아니라 한국어 랩이 전면에 나선 곡의 구성도 당시로선 낯선 것이었다.
낯설고 충격적인 무대. 심사위원들은 신인치곤 나쁘지 않은 점수를 주었다. 10점 만점에 7.8점.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은 그 무대에 7.8점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플에 시달린다. 심사위원들의 미적지근한 평과는 달리 방송이 나가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자, 학교에서 만난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그 신인 그룹의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야, 너 걔네 봤냐? 누구 말이야? 그 왜, 토요일에 신인무대에 나온 애들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서태지와 친구들이라던가? 아냐. 서태지와 아이들. 그래,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친근함을 내세우는 일본식 아이돌 시스템을 들여와 만든 그룹 소방차와 야차가 있었지만, 서태지는 그들과는 좀 달랐다. 만 19살이라는 앳되기 짝이 없는 나이, 은테 안경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빛과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 피부,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일단 전에 없던 비트는 10대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전국의 10대들이 그에게 열광했고, 그를 따라 대중문화 소비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열광했던 건 비단 10대만이 아니었다. 소련 붕괴 후 이상향을 잃고 방황하다 대중문화판으로 흘러들어온 일군의 386들은 ‘댄스에 메탈을 접목하고, 제도권 교육을 박차고 나왔으며, 직접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서태지에게서 록의 저항정신을 보았다. 게다가 가사도 은근히 심오하지 않나.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환상 속의 그대’ 중) 길을 잃고 헤매던 이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 2집을 들고나온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메가톤급 성공이 있었다. 동시대 뮤지션 중 흑인음악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다고 평가되는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얼마나 폭발적인 히트를 쳤는고 하니, 바로 한 해 전 터졌던 대마초 흡입사건 따위는 대중의 기억 저 멀리 날려버릴 정도였다. 후드 티셔츠를 입은 소년들이 길바닥을 메웠고, 전국의 가정에서 ‘저놈의 똥싼 바지’를 놓고 갖다버리려는 어머니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아들들의 전쟁이 발발했다.
2012 유튜브대통령
우발적 사고처럼 빵 터져
세계를 웃겨버린 싸이
반짝 ‘마카레나 열풍’에 머물지
아바 비견될 세계진출이 될지
‘강남스타일’ 가능성 광활
같은 해 ‘난 알아요’와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자웅을 겨루는 이 진풍경은 한국 가요계의 흐름을 완전히 비틀어 쐐기를 박아버렸는데, 가요계의 주류 흐름이 트로트로부터 댄스팝으로 완전히 넘어온 것이다. 그다음해 ‘현진영과 와와’ 출신의 듀오 듀스(DEUX)가 등장하면서, 바야흐로 가요계는 댄스팝 천하가 되었다. 말하자면 “오-에-오” 하면 “오에-오에-오” 하고, “현진영 고” 하면 “진영 고”라는 화답이 온 천지를 뒤덮던 시절.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실질적인 한국의 1990년대의 시작이었다. 1990년은 그저 숫자의 전환에 불과했고, 1991년 소련의 붕괴는 1980년대의 종말이었다. 낡은 것들은 사라져갔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 공간에 갑자기 서태지가, 현진영이, 김성재와 이현도가, 뉴 잭 스윙(흑인음악의 한 유형)이 도착했다.
그때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가 같은 시기에 들고나온 장르가 전부 뉴 잭 스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로부터 시작한 이 장르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 팝 시장을 휩쓸었던 지배적 장르였는데,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뉴 에디션과 밀리 바닐리, 바비 브라운을 거쳐 크리스 크로스까지 꾸준하게 이어진 당대 최신 트렌드였다. 그리고 동시대에 뉴 잭 스윙 계열의 곡을 들고나온 서태지와 현진영, 이현도의 목표는 사실 “우리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다/할 수 있다”에 가까웠다. 저 멋있고 근사한 ‘최신상’ 트렌드를 우리도 한국어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어찌나 강했던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툭하면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 이츠 트루’의 표절곡이 아니냐는 논란에 시달린다. 비단 서태지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 댄스팝 역사의 새벽을 연 이 셋의 곡들을 지금 다시 들어보면, 그들이 레퍼런스로 삼은 선배들이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현진영은 바비 브라운과 크리스 크로스를, 이현도는 뉴 잭 스윙의 아버지 테디 라일리를.
“영어로” “현지 트렌드로” 억누르던 ‘케이팝 콤플렉스’ 얼결에 날려
이런 일이 댄스팝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발라드의 새 장을 열었다 평가되는 윤상만 해도 처음에는 일본 음악이나 제3세계 음악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고, 히사이시 조나 사카모토 류이치의 팬들은 윤상의 작품들을 고운 눈으로만 볼 순 없었다. 1990년대 초반 댄스팝과 발라드 장르를 새로 써내려간 젊은 선구자들이 초창기 모두 레퍼런스의 과잉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그 레퍼런스들이 당시 그들이 구할 수 있었던 가장 최신의 트렌드였다는 것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시사한다. 1990년대 초반 한국 가요계를 지배했던 강박이 다름 아닌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였다는 사실이다.
이승환
어떤 의미에선 1980년대의 반동이었다. 서구의 문물을 반강제적으로 급하게 받아들였던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의 강박은 사실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1980년대는 그 강박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짓눌렸던 시대였다. 두 손 가득 피를 묻히고 권좌에 앉긴 했는데, 앉고 보니 정통성도 정당성도 아무것도 없어 난감했던 전두환은 어떻게든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 것’에 대한 집착을 세상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국정 4대 지표 중 하나로 ‘민족문화 창달’을 내세울 정도였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 것’에 대한 목마름이 정권 차원만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유신과 맞서 싸운 젊은이들은 전통 유희로부터 해학과 풍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투쟁 현장에 수용했다. ‘노래굿’이라는 장르명을 고수했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있었고, 김지하의 ‘오적’이 있었으며, 채희완이 주도했던 탈춤운동이 있었다. 정권 차원의 강박과 아래에서부터 자생된 움직임이 1980년대의 시공간에서 조우한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의 시작은 뮤지션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이제 자신들의 문화적 자양분이 된 해외 트렌드를 대놓고 한국에서 펼쳐 보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한국 가요의 최선봉에 서 있던 이들은 해외 뮤지션들의 사운드를 한국에서 구현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대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해외 트렌드와 무관하게 꾸준히 자기 음악을 하던 아티스트들도 사운드에서는 영미권의 수준을 따라잡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승환은 적자를 감수해가며 미국 현지의 사운드 엔지니어들을 고용했고, 이승철은 아예 뉴욕에서 4집 <색깔 속의 비밀> 녹음을 마쳤다. 김승진과 소방차로는 성이 안 차 물 건너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토미 페이지에게 열광했던 이들은, 이제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윤상과 이승환을 들으며 열광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우리도 저런 것 할 수 있어’라는 강박은 ‘외국 시장에서 직접 인정받고 싶어’로 자라났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참고했던 해외 뮤지션들의 색깔 위에 자신의 개성을 얹는 데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그렇다면 한번 겨뤄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하긴 했지만, 당시에도 한국의 음악시장은 너무 좁았다.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영화 <쥬라기 공원>이 벌어들인 돈이 현대자동차 1년 수익보다 크다”며 문화팽창주의를 살살 간질이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미 1989년 영국에 진출하려 했던 김도균과 임재범이 있었고,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일본 진출 시도가 있었다. 김완선은 대만을 공략했고, 넥스트를 해체한 신해철은 훌쩍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지 시장을 공략한 음반 <모노크롬>을 출시했다. 모두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김완선을 제외하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당대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해외 시장에서 실패를 맛봤다.
보아-김범수
해외 시장의 가능성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화방송>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중국 수출에 힘입은 안재욱의 중국 시장 진출과, 에이치오티(H.O.T.)의 중국 시장 진출, 그리고 댄스 듀오 클론의 대만 시장 진출이 그것이었다. 김완선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예열되어 있던 중화권 시장은 이들의 진출에 호의적이었다. 안재욱은 현지에서 국빈 대우를 받았고, 에이치오티 또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으며, 클론은 ‘대만의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 개인의 개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한국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정교하게 기획된 가수들이 먼저 해외의 응답을 받게 된 것이다. 어럽쇼, 이거 봐라. 음악적 접근이 실패한 자리에 돋아난 산업적 접근의 가능성은 제작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했다.
그 시점에서 ‘외국 시장에서 직접 인정받고 싶어’라는 강박은 어느새 ‘외국 시장에 진출해야 해’라는 강박으로 바뀐다. 때마침 한국의 음반 시장도 서서히 수축하기 시작했으니까.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엠피3(MP3)의 등장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히트곡만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장사에 여념이 없던 국내 제작자들의 근시안적 행보는 한국 음반 시장의 붕괴를 불러왔다. 예전엔 ‘해외 진출을 하고 싶다’ 수준이었던 문제가, 이제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로 커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에이치오티와 안재욱과 클론의 예가 있긴 했지만, 매번 그렇게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선봉에 이수만의 에스엠기획이 나섰다.
에이치오티의 중국 시장 진출로부터 해외 시장 개척의 산업적 가능성을 보았던 이수만은 아예 시작부터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보아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선구안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대중음악계와는 차원이 다른 리그라 여겨졌던 일본으로의 진출은 도박에 가까웠다. 다행히 도박은 잭팟으로 돌아왔다. 일본어를 공부해서 통역 없이 활동하고, 현지 작곡가를 기용해 만든 현지 트렌드에 맞춘 곡을 발표하는 방식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계은숙, 김연자와 조용필 이후 맥이 끊겼던 일본 시장의 문이 다시 열리자, 후속타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모든 아이돌 그룹은 잠재적인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고, 특히 이수만의 다음 작품이었던 동방신기와 천상지희는 그룹명부터 일본과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보아의 일본 히트곡들이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히트를 치면서 내수 시장용 음반과 일본 시장용 음반 사이의 차이도 점점 사라져갔다. 아예 내수 시장용 곡을 쓸 때부터 현지 팬들을 고려하고 곡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당연히 진출해야 하는 곳처럼 여겨졌다. 일본까지 진출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우리 것 강요·서구문물 급하게 수용한
1980년대에 대한 반동이 90년대 지배
‘우리도 저런 거 할 수 있어’ 강박
2000년대엔 외국시장 공략
보아·동방신기 현지화 전략으로
미국문 두드렸지만 실패
2005년 나온 유튜브가 케이팝 확산
영미권 트렌드와 거리 먼 싸이
모든 강박관념 내려놓고도 어필
이 무렵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보아가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김범수가 자신의 영문 이니셜 비에스케이(BSK)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장에 싱글 앨범을 낸 것이다. 우연히 김범수의 ‘하루’를 들은 미국의 유명 아르앤비(R&B) 프로듀서 케그 존슨이 김범수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미국 현지의 한인 레이블 국도레코드가 동참하며 성사된 프로젝트였다. ‘하루’는 현지 색깔에 맞춰 편곡되어 ‘헬로 굿바이 헬로’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고, 국도레코드의 헌신적인 프로모션 끝에 빌보드 100 세일즈 차트에 51위까지 올랐다. 비록 편곡을 거치긴 했지만 한국 가요 특유의 ‘뽕기’를 완전히 지우진 못했던 ‘헬로 굿바이 헬로’ 한 곡만 세 가지 버전으로 담아낸 싱글 앨범으로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차트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가수가 빌보드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때는 다들 알지 못했다.
걸그룹 원더걸스.
슈퍼주니어
한편 아시아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던 ‘한류’ 스타들은 2005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의 등장과 함께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제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관객들에게 뮤직비디오를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 박진영과 이현도가 미국에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진출해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던 시기였고, 알음알음 퍼져가며 동유럽부터 남미까지 전세계에 조금씩 팬을 키워가던 동방신기의 존재는 제작자들에게 ‘굳이 아시아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심어줬다. ‘우리도 저런 것 할 수 있어’로 시작했던 강박관념이 음악적 가능성과 산업적 가능성을 거쳐, 중국과 일본, 동남아를 순회한 끝에 마침내 한국에 처음으로 ‘저런 것’의 모델을 보여줬던 ‘본토’ 미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단계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미국 시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일본 시장에 진출할 때처럼, 철저히 현지 트렌드에 맞춘 앨범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린 세븐과 보아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시아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던 비는 정작 노래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출연으로 미국 시장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고, 본토 모타운 사운드를 표방한 ‘레트로 3부작’으로 미국을 공략하려 했던 원더걸스는 안타깝게 아직까지도 주류 시장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미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정서가 제작자들 사이에 다시 돌았다.
차라리 반응은 직접 진출이 아닌 인터넷을 타고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빅뱅과 투애니원,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투피엠과 미쓰에이 등 아시아 시장에서 강력한 팬덤을 이끌고 있던 한류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를 돌아다니던 서구 시장의 팬들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을 발견한 기획사에서 재빨리 아이튠스 스토어에 음반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류’라는 용어 외에도 영어문화권을 노린 ‘케이팝’이라는 조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케이팝을 따라 부르는 팬들의 인구도 점점 증가했다. 하지만 케이팝 열풍조차 여전히 서구 시장의 주류와는 별개의 흐름이었다. 여전히 케이팝 열풍은 독특한 취향을 지닌 리스너들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미국 시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느닷없이 유튜브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혹자는 싸이의 버클리 유학 경력을 거론하며 그의 음악적 뿌리를 영미권 음악으로부터 찾으려고 하지만, 데뷔하던 시점부터 싸이는 당대 영미권 음악시장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걸었다. 그가 데뷔곡 ‘새’를 선보였던 그해, 미국에선 어셔와 넬리가 넵튠스 스타일의 곡들을 선보였고, 매치박스 트웬티와 라이프하우스의 강세는 차라리 록 음악의 재래를 말하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 댄스곡을 리믹스한 불법 믹스 테이프를 팔아 용돈을 벌던 싸이의 음악적 자양분은 명백하게도 한국의 클럽문화였다. 1990년대 초반 한국 대중음악에서 서구 사운드를 자기 식으로 구현해보려 했던 선배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소년이, 세계 음악시장의 조류를 좇기보단 자신의 원류에 충실한 음악을 들고나온 것이다. 그 결과물인 ‘강남스타일’의 세계적인 성공은,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오랜 시간 앓아온 강박관념을 얼결에 깨부숴버렸다. 아주 오랫동안 서구 음악시장과 같은 시간대에 편입되고 싶어했던 한국의 대중음악이, 사실은 이미 그 시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굳이 현지 트렌드를 과도하게 따라가지 않아도, 영어로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물론 이걸 두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과잉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강박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겠다’는 강박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의 방식대로 만든 내수 시장용 트랙의 범세계적 히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싸이가 ‘원 히트 원더’로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오랫동안 앓아온 콤플렉스가 마침내 해소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싸이가 이뤄놓은 것은, 그리고 그의 다음 행보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승한/티브이평론가
이승한/티브이평론가
이승한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살까지 말을 못해 주변에 걱정을 끼쳤으나, 티브이 화면 자막을 한 글자씩 짚어가며 글을 배워 말문을 뗐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티브이만 보니, 커서 뭐 될래”라는 힐난에, 20대 내내 티브이평론가라는 기묘한 직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대중문화 웹진 <채널 꺄뜨르>와 <텐아시아>를 거쳐 지금은 소속 없는 글쟁이로 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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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국위 선양 '앵벌이'로 전락하다!
[정희준의 '어퍼컷'] 미국 콤플렉스의 끝은 어디인가?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기사입력 2012-10-09 오전 7:55:28
싸이는 2001년 "나 완전히 새됐어"라는 골 때리는 가사가 반복되는 '새'로 돌풍을 일으키며 데뷔한다. 가사나 안무도 그랬지만 싸이 자체가 노골적 반전과 코믹한 모순의 덩어리였다. 한마디로 "쟤가 가수야!?"였다.
나도 그 경계를 넘나들긴 하지만 세상에, TV 나오는 가수가 달덩이 같은 얼굴에 배가 가슴보다 더 나왔다. 그 굴곡 있는 몸매에 멋은 엄청 부린다. 옷차림은 엄마 옷 같기도 하고 밤무대 스타일 같기도 한데 또 춤은 막춤이다. 만화 캐릭터 같다. 순두부찌개에 치즈 넣은 꼴인데 먹어보니 맛이 있다. 잘 나갔다.
그런데 그 해가 가기도 전에 대마초 흡입으로 검거된다. 폭행도 아니고 음주 운전도 아니고 대마초다. 2002년 그는 '챔피언'으로 부활하며 죄사함을 받은 듯하더니 2007년엔 병역 특례 부실 복무 문제로 군에 재입대한다. 싸이로선 억울한 게 있었겠지만 세간에 알려지기는 사실상 병역 비리나 다름없었다.
대마초와 병역 비리. 이쯤 되면 연예인 생활은 끝난 거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한다.
"대한민국 만세~."
'강남 스타일'이 외국에서 (아, 그렇다. 백인종 국가들에서!) 인기를 얻게 되고, 그냥 외국도 아닌 미국의 주요 방송에 등장해 호응을 얻게 되자 나라가 들썩인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도 김일성, 김정일을 빼면 없었을 것인데 이들 김 씨 부자들과 달리 미국인들을 즐겁게 해주고 춤까지 추게 했다. 이렇게 되니 한국인들의 '싸이 칭송'이 대한민국의 천정을 뚫어버렸다. 아마 대선 정국이 아니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싸이의 엉덩이에 짓눌려 있을 게다.
'강남 스타일'이 미국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자 모든 언론은 1위 등극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제 효과' 기사도 넘친다. 국가도 화답한다. 국무총리 김황식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 인기를 끄는 만큼 "관광 인프라 확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 말씀 하셨다.
드디어 언론에서는 월드컵, 올림픽 때나 써먹던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라는 인터뷰 코멘트가 다시 등장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강제 출국'에 '입국 금지' 주장이 봇물을 이루는 듯하다.
그런데 지난 주 누리꾼 사이에 시끌벅적한 말다툼이 있었다. 싸이가 빌보트 차트 2위에 오른 상태에서 귀국을 하자 미국에 머무르며 열심히 활동을 해 1위에 올라야지 왜 귀국해서 대학 축제'나' 다니느냐는 것이다. 나라를 알려 국위 선양할 기회인데 "왜 조기 축구하러 귀국했냐"며 비난한다.
"세계 정복을 앞둔 중요한 때 돌연 귀국해 대학 축제를 다니고 있다니 참으로 김 빠진다"는 주장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요? 제발 강제 출국시키고, 필요하면 당분간 입국 금지라도 시켜야합니다"에 이르면 이게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한 술 더 뜨기 경쟁이 붙었다. "이번 열풍은 싸이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인 문제"라는 사람이 등장하더니 "이건 국가적인 사건"이라며 "1988년 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에 비견될 정도"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국위 선양 '앵벌이' 탄생하다
ⓒ뉴시스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은 한 문화평론가의 칼럼이다. 그는 싸이가 귀국이 이전에 했던 출연 약속 때문이라고 하자 이렇게 썼다.
"과거에 싸이하고 약속했던 국내의 이해당사자들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싸이를 풀어줘야 한다. 싸이가 빌보드 톱10에 올라간 건 천재지변에 준하는 비상사태다. (…) 따라서 국내 행사 다 물리고 싸이를 빨리 '강제 출국'시켜야 한다."
평소 좋아하던 문화평론가인데 그의 주장은 참으로 '국가'스럽고 반문화적인 발언이다. 그리고 싸이의 빌보드 톱10 진입이 '천재지변'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싸이가 빌보드 '넘버원'이라도 하는 날엔 미국의 '멸망'을 걱정해야 할 것인가.
노래 하나 가지고 '국가'와 '국격'을 따지고 '국위 선양'과 '세계 정복'을 주장하는 모습은 사실 우리 스스로에게 익숙한 자화상이다. 하긴 서울시가 후원한 지난 주말의 콘서트 제목도 '글로벌 석권 기념 콘서트' 아니었나. 그렇지만 어딘지 촌스럽다. 보자기로 망토 삼고 장난감 칼, 장난감 총 휘저으며 "두두두두" "쓔웅~" "받아랏" "야 너 죽었어" "으아~"를 외치면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전쟁놀이 같기도 하다. '말춤'으로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했다니 말이다?
'말춤'이 '한국인의 우수성'?
지금의 싸이 신드롬은 '강남 스타일'이 유튜브 순위에 이어 백인이 지배하는 국가들의 대중음악 순위에 오르면서 '어느 나라에서 몇 등' 그런 식으로 시작됐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입증하기에 등수보다 좋은 게 없다. 그래서 우리가 영웅시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외국인을 '무찌른' 운동선수, 금메달을 딴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때문인지 사실 우리는 외국과는 달리 생명을 구한 소방관, 정의를 세우는 경찰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교사나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영웅으로 자리하기는 힘든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내다 버린' 인물조차도 외국에 나가 성공하면 얼굴에 철판 깔고 다시 데려와 영웅으로 숭배한다. 하인즈 워드나 추성훈이 그런 경우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자랑스런 한국인의 피'다. 또 심지어는 외국의 '명품 구단'에서 뛰면 벤치를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도 '메가 울트라 슈퍼 초특급 스타'가 되기도 한다. 박지성이 그런 경우다. 경기에 출전만 해도 "맨유의 당당한 일원임을 증명했다"고 쓴 기사가 수백 개는 된다. 이럴 때 등장하는 말이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다.
앞에 언급한 유명인 외에도 박찬호, 박세리, 박태환, 김연아 그리고 지금의 손연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다른 운동선수들에 비해 월등한 관심과 인기를 누리는 데에는 이들이 백인들이 주도하는 종목이나 미국에서 성공한 인물이라는 뚜렷한 이유가 존재한다. 이들의 인기 비결과 지금의 싸이 열풍에는 백인에 대한 콤플렉스, 미국에 대한 동경 그리고 서양에 인정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뒤섞여 있다.
우리들의 콤플렉스 그리고 자아도취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는 '동전의 양면'도 아니고 '한 몸'이다. 1999년 서울의 강남에서 미국 분유를 먹으면 서양인처럼 늘씬한 다리를 갖게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곧 강남의 아기 엄마들이 국내 분유보다 무려 50퍼센트나 비싼 고가의 미국 분유 '씨밀락'을 사재기를 해대는 통에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인종적으로 '숏다리'인 한국의 아기들이 '롱다리'인 미국 아기들이 먹는 미국 분유를 먹으면 다리가 (다리만!) 길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이성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집단일 강남의 젊은 엄마들은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이러한 비이성적 행위를 집단적으로 실천에 옮겨 버렸다. 한 학자는 ''롱다리 콤플렉스'에 걸린, 다시 말해 '서양인 되기'라는 편집증적 욕망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은 때론 황당한 일로 연결된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 주의 한 대학에서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가 총으로 서른두 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져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주미 대사가 "대사로서 슬픔에 동참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는 다소 어리둥절한 발언을 하더니 급기야 희생자 수만큼 "32일간 릴레이 단식을 하자"는 제안을 한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계가 서울광장에서 '사죄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다.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던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조기 교육을 가야 하고 유학도 가야 하고 또 이민도 가야 하는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 사람 수십 명을 죽이자 한국인들은 미국에 사과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적 사죄 열풍이 불었다. 우리가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전에 없던 호들갑스런 사과를 하자 이러한 과잉반응에 놀란 미국이 오히려 말리고 나서기까지 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민족주의적 죄의식'이라고 평했다.
우리에게 미국(또는 백인)은 이런 존재다. 우리의 미국 콤플렉스는 우리로 하여금 이들을 자나 깨나 모방하게 했고 미국에 대한 동경은 이들에 대한 끝없는 구애로 이어졌는데 우리가 혹 잘못이라도 하면 '오버'를 해가면서라도 사죄를 했다. 우리의 인식 구조가 이러한 상황에서 싸이가 미국인들을 즐겁게 해주고 미국 대중음악 순위에 오르자 한국에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미국인님'들을 기쁘게 해드렸으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그래서인가. 언론도 '강남 스타일'에 대한 '외국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인터넷에서도 다양하고도 엄청나게 많은 '외국인 반응' 동영상이 올라있다. 싸이의 노래를 신나게 듣던 중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니 더욱 더 힘을 내 열광하는 꼴이다. 우리가 미국인들에게 인정받았단 말이다!
지난 주 싸이가 서울광장 공연에서 소주를 병나발 불었다. 어린이들도 섞여있을 8만 관중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괘념치 않을 것이다. 곧 미국으로 출국할 그는 국위 선양에 나서야 할 몸이니까 말이다. 혹 이러는 국민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거 자꾸 떠드는 거 좋지 않아요. 김장훈과의 갈등도 다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번에 출국한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번 주 빌보드 1위에 올라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 세계 정복을 했으면 해요."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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